태권도 역사

초창기 무도를 창관한 인물들
태권도 역사의 시작은 "태권도"라는 명칭이 탄생한 시기를 전후로 해서 시작된다.
정확한 사실과 자료, 근거가 없는 고대사를 태권도사에 이입하려고 하는 것은 논쟁의 소지가 끝이 없기 때문이다.
1-태권도 명칭 탄생 이전 1945~1954년
태권도 명칭 탄생 이전 1944년부터 조선에서는 일본의 무술과 중국 무술이
들어오게 되는데 일본과 중국에서 활동한 이원국, 황기, 윤병인,
전상섭,노병직 등이 공수도, 당수 도라는 무도명으로 처음 이 땅(조선 반도)
에 무도를 보급하기 시작했다.
특이한 사항은, 무덕관, 청도관은 "당수도"라는 무도명으로
송무관, 창무관,지도관은 "공수도"라는 무도명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시대와 창관한 사람들을 살펴보면,
1944년 청도관 창설자, 이원국
1945년 무덕관 창설자, 황기
1946 조선연무관 창설자 전상섭, 이후 1953년 "지도관"으로 개명, 윤쾌병
1946년 YMCA권법부 창설자 윤병인, 이후 1953년 "창무관"으로 개명,
이남석
1947년 송무관 개관 창설자, 노병직
1945년 일본으로부터 해방한 조선은 남과 북으로 나뉘게 되고 1950년
6.25 전쟁 이후 남에서는 5개관 (청도관,무덕관,지도관,창무관,송무관)이
본격적으로 당수도, 공수도가 전파되기 시작되었다.
2-태권도 명칭 탄생과 정착기 1955~1965년
1950년 6.25전쟁 이후 당수도, 공수도의 이름으로 시작한 5개관에서 분관된 것이 "오도관" 정도관" "강덕원" "한무관"으로서,
이때가 1953~1956이다.
1954년 군대에서 시작한 오도관은 최홍희 장군이 창관 했으며 최 장군은 1953년 11월 29사단을 제주도에 창설, 초대 사단장으로 있으면서
군인들의 신체와 정신적 무장을 위하여 본격적으로 자신의 사단, 군인들에게 무도를 가르치었다.
이때 최홍희 장군은 제주도 모슬포에 주먹을 상징하는 권(拳)의 주먹탑을 건립하게 되는데 이것은 최초의 태권도 탄생을 알리는 조형물이 된다.
이후 29사단이 1954년 강원도 설악산(용대리)로 이전하고 "오도관"
창설과 함께 최홍희 장군은 29사단 1주년과 1군 창설 4주년 기념식에서 자신의 오도관 군인들이 이승만 대통령 앞에서 무도 시범을 보이게 되는데 이때 남태희와 한차교가 시범하는 것을 보고 이승만 대통령이
"태껸"이라는 말을 하게 되고 이를 듣던 최홍희 장군은 기존 당수도,
공수도에서 벗어나려는 무도명을 찾게 되면서 "태껸"에서 "태"를 남태희 부관한데 한자로 찾아보라고 지시한다.
최홍희 장군은 중국의 한문, 한학을 정통으로 공부한 경력으로 "태"(跆)를 어렵게 찾아내어 주먹을 상징하는 권(拳)을 붙여 "태권"을 세상에
처음으로 내놓게 된다.
"태권"에 무도의 "도"를 붙여 "태권도"란 무도명을 만든 최홍희 장군은 공식적으로 정부로부터 태권도를 인정받기 위해 "명칭제정위원회"를
구성해서 1955년 4월 11일 위원회로부터 태권도를 제정하였으며 이날을 기념하여 4월 11일을 태권도 탄생일로 공포했다.
또한 최홍희 장군은 태권도 명칭 제정하고 공신력을 얻기 위해 당시
이승만 대통령으로 부터 한자로 태권도라는 휘호를 받아내어 공표했다.
태권도란 무도명이 탄생되긴 했으나 당시에는 한자 태(跆)가 상용화되지 않는 글씨라서 "택권도"라는 글로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으며 태권도란 무도명이 자리 잡는 되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1955년 4월 11일 태권도 명칭 제정 이후 최홍희 장군은 군대에 장군직을 십분 활용하여 군대에서부터 태권도를 본격 보급하게 되고, 태권도를 알리기 위해 군인들에게 거수경례를 "태권"이란 구호로 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또한 최홍희 장군은 태권도를 국내에서 해외로 보급하기 위해서 1959년
3월, "국군태권도시범단"을 구성해서 월남, 대만에 순회 시범을 했으며
이것은 "태권도"라는 명칭으로는 최초로 해외에 공식적으로 알리게 되었다.
그리고 1959년 9월 3일 대한체육회 빌딩에서 "대한태권도협회"를 출범하지만 1960년 4.19로 인해서 공인되지 못하고 공수도에 애착이 깊은, 일부 지도관,송무관,창무관 관장들에 의해 태권도의 "태"와 공수도의 "수"를 합쳐 만든 "대한태수도협회"를 1961년, 창립하면서 최홍희 장군과 마찰이 시작되었지만 최홍희 장군은 다시 1965년 8월 5일
"대한태수도협회"를 "대한태권도협회"로 돌려놓아 회장을 맡기도 한다.
1959년 태권도라는 무도명으로 해외에 최초로 알린 국군태권도시범단 이후부터 최홍희 장군은 태권도를 우리 민족 무도로서 해외에 개척하기 위해 더욱 힘 써는데
1965년 "한차교,박종수,김중근,권재화"를 조직하여 "구아시범단"(구라파, 아프리카)을 데리고 유럽과 아프리카를 장기간 순회 시범하면서
태권도의 국제조직을 출범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한다.

월남 태권도 교관단과 미군들

국제태권도연맹 창립
4-스포츠와 무도 태권도의 양분화 시작 1974~2002년
1972년 최홍희 총재는 한국 정부와 마찰로 캐나다로 망명하면서 ITF 본부를 캐나다로 이전하게 되고. 1974년 7월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23개국이 참가한 제1회 세계선수권대회를 개최했다.
이후 캐나다를 기점으로 ITF는 세계화를 위해 최홍희 총재는 해외 순방 세미나에 들어가고 1980년에는 북한에도 ITF 태권도가 처음으로 보급하면서 북한 정부의 막강한 지원으로 1985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본부를 설립, 이전하면서 2023년 카자흐스탄에서 22회까지 세계대회를 개최했다.
한편 ITF 태권도가 1972년 한국을 떠난 이후 해외에서 활동 영역을
넓혀가는 과정에서 한국 정부는 ITF 태권도를 파괴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한국 사범들을 회유하기도 했다.
1972년 ITF 태권도가 캐나다로 떠나자 한국에서는 1972년 국기원
중앙도장을 건립하고 1973년 세계태권도연맹(WTF)을 창립한다.
태권도는 원래 시작부터 무도적 성격으로 출발했으며 ITF 태권도는
군대에서 시작한 태권도로서 일격 필살의 정신을 담고 있다.
한편 WTF 태권도는 1973년 제1회 세계선수권대회를 개최하면서 태권도가 경기화, 스포츠화되기 시작했으며 경기종목으로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아서 1988년 서울 올림픽,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시범종목을 거쳐 1994년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어 완전한 스포츠 태권도를 이루었다.
1972년~2002년까지 30년 동안 태권도는 ITF, WT 양분된 모습으로 무도와 스포츠로서 같은 이름이지만 다른 성격의 태권도로서 세계화되었다.


제주도 모슬포에 있는 주먹탑
이승만 대통령 참석하에 무도 시범후 주먹을 설명하는 최홍희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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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명칭제정위원회 보도기사
이승만 대통령의 태권도 휘호


택拳 이라고 표기한 당시 신문기사
태권도 명칭 이후 창 안한 충무型


태권도 명칭 제정 이후 군에서 "태권" 휘호를 쓰는 최홍희 장군
태권도 명칭으로 최초의 사례 , 국군태권도시범단


대한태권도협회 창립, 1959,9.3
구아시범단
3-국제태권도연맹 창립과 세계화 1966년~1973년
태권도라는 명칭이 해외에 공식화된 이후 1962년부터는 월남에 정식으로 태권도 교관단이 파견하여 미군을 비롯 현지 일반인들에게 태권도가
보급되기 시작하는데 이것은 공식적인 태권도 교관의 활동으로 해외 개척의 시작으로 기록된다.
그리고 1965년 구아시범단을 통해서 준비한 국제조직으로서 최홍희 장군은 1966년 3월 22일 구조선 호텔에서 국제태권도연맹을 창립하는데 이것은 우리 민족 역사상 최초의 국제기구로 출범했다.
당시 기록을 보면,
한국, 베트남,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미국, 서독, 이태리, 터키, 아랍공화국의 9개국
조직 구성도는
*명예총재: 김종필
*명예 부총재: 김완용,김용태
*총재: 최홍희
*부총재: 이상희,조하리(말레이시아 상공부장관),노병직
*사무총장:
*기술 위원장: 이종우
*총무;이계훈
*계획:한차교
*재무:이성우
ITF (International Taekwon-do Federation)를 창립한 최홍희 초대 총재는 태권도를 국제기구로서 십분 활용하기 시작하는데 그가 캐나다로
망명하는 1972년까지 태권도 형(型)(품새, Tul) 24개를 완성하고,
형(품새)을 후에 Tul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천지~통일 24개)

최홍희 총재 해외 순방 세미나 보급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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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WTF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국기원 1973년
5-인터넷 상용화 이후 태권도 역사의 변화 2000~2024년
태권도는 인터넷이란 거대하고 투명한 새로운 플랫폼이 세상에 나오기 시작한 2000년대와 그 이전의 역사는 많은 변화와 더불어 변절된 역사론으로 분쟁의 소지가 많았다.
인터넷이 상용화된 2000년부터 최홍희 ITF 총재가 세상을 떠난 2002년까지만 해도 ITF 본산인 한국 내에서조차 ITF와 최홍희 관련 자료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것은 1972년 최홍희 총재가 캐나다로 정치적인 망명을 한 이후부터 1997년까지 한국 정부는 철저하게 ITF와 최홍희 정보를 차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0년대 인터넷이 나타나면서 글로벌적 정보가 쏟아져
나오자 ITF 태권도의 정통성과 역사가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으며 2024 오늘은 위키백과 등에서도 태권도 역사는 팩트와 자료 중심으로 투명화되기 시작했다.
2024년 6월 15일 정순천